삼다수(三多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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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장면 시키신 분~"

추억의 TV광고처럼 서울에서건 마라도에서건 자장면은 배달된다. 비단 자장면 뿐만 아니다. 피자, 통닭은 물론 찌게 백반에 신선한 회까지도 전화 한 통이면 집으로 온다. 휴대전화가 보편화된 덕분에, 이제는 집을 벗어나 대학캠퍼스, 한강 둔치 등 어디에서나 원하는 음식을 배달시킬 수 있다. 실로 韓民族은 '배달민족'이라 할만 하다.

  한국은 왜 이렇게 배달문화가 발달해 있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수요는 주로 식사시간에 자리를 비우기 어려운 사람들에게서 발생한다. 한국에는 유난히 자영업자가 많다. 이들은 식사시간에도 자리를 비울 수 없다. 장사가 잘 되는 집은 잘되는 집대로 너무 바빠서, 안되는 집은 대부분 주인이 홀로 영업을 하므로 가게를 지켜야한다. 이 때문에 요식업에 종사하지 않는이상, 손님이 뜸한 시간에 음식을 배달시켜 후다닥 해치운다. 시장 상인이나 현장 인부들도 비슷한 이유로 배달 음식을 자주 찾는다.

  일 인이 거주하는 고시원,고시텔, 원룸이 늘어난만큼 이 곳으로의 배달도 부쩍늘었다. 학업 때문에, 취업 때문에 가족을 떠나 홀로 생활하는 나홀로 족이 많아진 까닭이다. 대부분이 젊은층인 이들은 직접 요리를 하기보단, 인스턴트나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떼운다. 고시텔, 고시원에 공동 취사 시설이 있다고는 하나, 제대로 조리하기 어렵고, 혼자 사는데 음식을 만들면 남아서 버리는 게 태반이다. 매번 외식을 하자니, 값도 비쌀 뿐더러 바쁜 세상살이에 사람들과의 약속도 번거로울 따름이다. 덕분에 치킨 반마리는 물론, 자장면 한 그릇도 배달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모 패스트푸드 체인은 이런 시류를 반영했는지 일정 금액 이상을 주문하면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시작했다.

  배달민족은 옛부터 가족을 食口라 불렀다. 함께 밥 먹는 사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근래들어 식구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앗다. 부모는 일터에서, 자식들은 자취방에서 하얀 껍질 벗긴 나무젓가락을 휘저으며 끼니를 떼운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 食을 求하고 食口를 求하기 위한 생의 몸짓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도 있건만, 우리에겐 언제부터 이 문제가 '떼움의 대상'이 되었나. 그래서일까, 이제는 그토록 좋아하던 자장면 배달이 달갑지만은 않다. 매끼니 같은 밥, 같은 반찬이라도 온 가족이 오손도손 둘러앉아 식사하던 그 때가 그립다.


기본소득 읽기

 
Update 02.08 (월)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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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9 13:03프린트기사 원본복사가 가능한 심플모드입니다.
[번역]기본소득의 역사(2)
프로메테우스 메일보내기

기본소득제도는 21세기형 사회복지 제도로 최근 세계 곳곳에서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최초에 일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고안된 기본소득제도는 브라질, 나미비아 등에서 정책화되고 있으며,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도 활발하게 정책 차원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최광은 사회당 대표가 직접 번역한 글입니다. 기본소득의 역사(1)은 지난 28일 프로메테우스에 등록됐으니 참고 바랍니다.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 홈페이지(http://www.basicincome.org/bien/aboutbasicincome.html) 에서 원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최근 사회대안포럼(http://alternative-forum.tistory.com 운영위원장 금민)이 기본소득과 관련한 포럼을 연속으로 주최하고, 강남훈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와 곽노완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교수가 한국형 기본소득 모델을 발표하면서 기본소득이 21세기 경제 대안 정책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사회당은 기본소득위원회를 특별위원회로 설치해 한국 정당 최초로 기본소득을 사회 의제화하기 시작했습니다.<프로메테우스>

20세기에는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이 특히 집중되었던 세 시기가 있었다. 첫 번째로, “사회 배당”, “국가 보너스”와 “국가 배당”과 같은 이름 아래 진정하게 조건 없는 보편적 기본소득에 대한 제안이 영국의 전간기 논쟁에서 전개되었다. 두 번째로, 몇 년 간의 침묵 이후 이러한 형태의 아이디어가 1960년대와 70년대 동안 미국의 “시민보조금”과 “부의 소득세” 제도에 관한 논쟁에서 재발견되었으며 상당한 대중성을 획득했다. 세 번째로, 70년대 말과 80년대 초반 이후로 기본소득 제안이 북서유럽의 몇몇 나라들에서 활발하게 토론됨에 따라 논쟁과 탐구의 새로운 시기가 도래했다. 이와는 아주 별개로, 20세기에는 또한 알래스카의 모든 거주자들에게 매년 배당을 제공하는 알래스카영구기금(APF)의 탄생을 통해 세계 최초로 완전한 기본소득 계획이 도입되었다.

1. 교전 상태에서 존엄함으로: 전간기 영국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러셀의 조합

제1차 세계대전의 끄트머리인 1918년 영국에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수학자, 철학자, 비국교도 정치사상가, 전투적 평화주의자 그리고 노벨문학상 수장자인 버트란트 러셀(1872-1970)은 1918년에 처음 출판된 간결하고 날카로운 시각의 책인 <자유로 향하는 길>에서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의 장점들을 결합시키는 사회 모델에 관해 논한다. 이것 중 하나의 핵심 요소는 “필수품을 위해 충분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다.

△ 버트란트 러셀
“무정부주의는 자유와 관련하여, 사회주의는 노동 유인과 관련하여 장점을 갖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두 개의 장점을 결합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는 없을까? 나는 우리가 찾을 수 있다고 본다. … 보다 친숙한 용어로 표현하면, 우리가 옹호하는 이 계획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다. 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간에 필수품을 위해 충분한 한정된 적은 소득은 모두에게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생산 총액이 보증하는 것만큼의 더 큰 소득은 공동체가 유용하다고 인정하는 어떤 일에 종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 교육이 끝났을 때, 어느 누구도 노동을 강요당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노동을 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들도 얼마 되지 않는 생계수단을 받으며 완전히 자유롭게 남아야 한다.” [주1]

밀너의 국가 보너스

같은 해에 젊은 기술자인 퀘이커와 노동당원인 데니스 밀너(1892-1956)는 그의 부인인 마벨과 함께 공동으로 ‘국가 보너스를 위한 계획’(1918)이라는 표제가 붙은 간결한 소책자를 발간했다. 폭넓은 일련의 논의들을 동원하여 그들이 주장했던 것은 영국의 모든 시민들에게 조건 없이 매주 지급되는 소득의 도입이었다. 1인당 GDP의 20%로 맞춰진 이 “국가 보너스”는 특히 전쟁의 여파로 매우 심각했던 빈곤 문제의 해결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생계 수단에 대한 도덕적 권리를 갖기 때문에 이러한 수단의 철회 위협을 통해 강제된 노동에 대한 어떤 의무도 배제되었다. 밀너는 이어서 <국가 생산고에 대한 보너스로 더 많은 생산을>이라는 제목으로 존경할 만한 출판업자가 출판한 책에서 이 제안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나중의 토론들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대다수의 논의들은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실업의 덫에서 노동 시장의 유연성까지, 낮은 수급 비율에서 이윤 공유의 이상적인 보완까지. 하지만 “생산주의적” 사례에 강조점이 있는데, 국가 보너스는 효율성 그 자체 때문에 한층 더 정당성이 입증될 수 있다. 밀너의 제안을 동료인 퀘이커 버트램 피카드가 열정적으로 뒷받침해주었고, 단명했던 국가보너스연맹(SBL)도 이를 지지했다. 밀너는 이를 기치로 총선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 제안은 1920년 영국 노동당 회의에서 토론되었으나 다음 해에 결정적으로 거부되었다. [주2]

메이저 더글라스와 사회 신용 운동

하지만, 또 다른 영국의 기술자 클리포드(“메이저”) 더글라스(1879-1952)가 매우 커다란 큰 영향력을 지닌 이 아이디어를 다시 붙들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더글라스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산업이 얼마나 생산적이었던지 이에 충격을 받아 과잉생산의 위험에 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은행들이 신용을 주는 것을 억제했고 구매력이 단지 매우 느리게 증가하고 있었을 때인데, 4년간의 전쟁으로 가난해진 인구가 어떻게 쓸모 있는 상품을 풍족하게 소비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글라스(1924)는 일련의 강의와 저작에서 모든 가구들에게 매달 “국가 배당”을 지급하는 것을 포함한 기법의 하나로 종종 매우 혼동되는 표현인 “사회 신용”의 도입을 제안했다. 사회 신용 운동은 다양한 운명을 맞이했다. 이 운동은 정작 영국에서는 확립에 실패했지만, 캐나다에서는 많은 지지자들을 끌어 모았다. 비록 국가 배당을 도입하는 아이디어는 재빠르게 버렸지만, 사회신용당(SCP)이 캐나다의 앨버타 주를 1935년부터 1971년까지 통치했다.

콜과 미드의 사회 배당에 관한 논의

사회 신용 운동의 대중성이 영국 인구의 폭넓은 계층에서 처음에는 확산되고 다음에는 줄어들었던 반면, 조건 없는 기본소득에 관한 아이디어는 영국 노동당에 가까운 작은 지식인 써클에서 지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저명한 사람은 옥스퍼드의 치첼 사회정치이론 학과장을 처음 맡았던 (나중에는 이사야 벌린, 챨스 테일러 그리고 G. A. 코헨이 맡았다.) 경제학자 조지 D. H. 콜(1889-1959)이었다. 몇몇 책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가 “사회 배당”(콜, 1935)이라고 불렀던 것을 확고하게 지지했다. “현재의 생산력은 사실상 현재의 노력과 발전의 단계에서 통합된 창의력과 기능 그리고 생산 기술에서 달성된 교육이라는 사회적 유산이 결합된 결과물이다. 그리고 모든 시민들이 이러한 공동 유산의 산출 가운데 일부를 공유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배분 이후 생산물의 나머지는 오직 생산에서 현재의 서비스에 대한 보상, 그리고 유인의 형태로 분배되어야 한다는 것이 항상 유일하게 옳다고 보인다.”(콜 1944: 144쪽.) J. S. 밀에게 바친 그의 책 <사회주의 사상사>(1953)에서 콜은 또한 영어 표현인 “기본소득”을 사용함으로써 조건 없는 기본소득에 관한 아이디어에 주목한 최초의 사람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본소득”이란 표현은 1980년대에 국제적인 토론이 이루어지면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주3]

△ 제임스 미드
정치적으로는 덜 적극적이었지만 콜보다 더 광범위한 국제적 명성을 지닌 또 다른 옥스퍼드의 경제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제임스 미드(1907-1995)는 “사회 배당”을 매우 열성적으로 지지했다. 사회 배당에 관한 아이디어는 그의 책 <노동당 정부를 위한 경제 정책 개요>(1935)와 몇몇 다른 초기 저작들(미드 1937, 1938)에서 공정하고 효율적인 경제의 핵심 구성 요소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아가싸토피아(역주: 미드가 훌륭한 사회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던 표현) 프로젝트의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는 마지막 저작들(1989, 1993, 1995)을 이 프로젝트에 바쳤다. 여기서 자본과 노동 사이의 협력과 공적 자산에 의해 기금이 마련된 사회 배당이 실업과 빈곤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함께 제시된다. “사회 배당”이란 표현이 제임스 미드의 저작들에서 나타났던 때와 같은 시간대에 런던정경대학의 두 교수인 오스카 랜지(1904-1965)와 아바 레르너(1903-1982)가 시장 사회주의에 관한 유명한 토론을 하면서 이를 또한 표면화시켰다. 레르너(1936)의 비평에 답하면서 랜지(1937)는 “사회 배당”이라는 분명한 표현을 사용했는데, 기여와는 독립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했던 이것을 그는 집단적으로 소유한 자본에 대한 보상에 속하는 것으로 여겼다.

자유주의자 줄리엣 라이즈-윌리암즈(1943)가 기본소득을 핵심 구성 요소로 한 “새로운 사회 계약”을 제안했던 것은 이러한 전간기의 토론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 수행을 일정한 보조금에 대해 필수적인 짝으로 만듦에 따라 보편적이긴 했지만 전적으로 조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보조금의 지급이 파업 중에는 중지되었다. 하지만, 1942년 또 다른 자유주의자이자 런던정경대학 학장이었던 윌리엄 베버리지가 (통일된 국민 아동수당과 사회보험에 관한 폭넓은 프로그램과 연결된) 국민 최소 소득에 대한 대안적인 제안을 했다. 이것은 영국에서 널리 알려졌고, 곧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도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조건 없는 기본소득 형태의 제안은 영국의 정책 관련 논쟁의 언저리로 들어갔다.

2. 단명했던 활기: 1960년대 미국

최소 보장을 향한 세 미국인의 접근법

영감을 준 세 가지 주요 원천과 함께 보편적 기본소득에 관한 실질적인 논쟁이 다시 부상했던 것은 시민권 운동이 정점에 이르렀던 1960년대 격동의 미국에서다. 첫째로, 로버트 테오발드(1929-1999)와 그의 ‘삼중 혁명에 관한 특별위원회’(1964)(역주: ‘삼중 혁명’은 1964년 3월 22일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과 다른 정부에 보낸 공개 각서다. 일련의 사회운동가, 교수, 전문가들이 ‘삼중 혁명에 관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각서에 서명했다.)는 다양한 출판물에서 막연하게 특정한 최소 소득 보장을 지지했는데, 예컨대 “자동화가 유급 노동을 쓸모없도록 하고 있어서, 정부의 시혜가 대중에게 자동화로 생산된 거대한 하사품을 구입하기 위한 수단을 주는 유일한 방법이다.”라는 신념은 더글라스를 떠올리게 한다. 둘째로,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만(1912-2006)은 그의 대중적인 책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그가 “부의 소득세”라고 부른 것을 도입함으로써 미국의 복지 형태를 급진적으로 단순화시키자고 제안했다. 직선적 부의 소득세에 대한 프리드만의 제안은 소득세와 소득이전 체계를 전적으로 통합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짜깁기된 현존 사회복지 체계들에 대한 단순하고 급진적인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이는 그 자체로 이상적인, 소득이전 없는 자본주의 사회로 가는 길로 접어드는 이행의 단계를 의미했다. (프리드만이 어디에서 이러한 아이디어와 관련 참고자료들을 구했는지에 대해 그 자신의 설명을 보려면, 2000년 5월에 발행된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 뉴스플래쉬 3호에 있는 수플리시와 프리드만의 의견교환을 참고하라.)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인데, 제임스 토빈(1918-2002), 존 케네쓰 갈브레이쓰(1908-2006), 그리고 다른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일련의 글들에서 보다 일반적이고, 보다 관대하며, 그리고 현존하는 지원 프로그램들보다 의존성을 적게 만들어내는 최소 소득 보장에 관한 아이디어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토빈의 시민보조금

△ 제임스 토빈
토빈, 페츠만 그리고 미에즈코우스키는 1967년에 부의 소득세 제도에 관한 첫 번째 기술적 분석을 내놓았다. 여기서 그들은 모든 시민들에게 자동적으로 지급하는 것을 포함하는 변형에 호의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죠셉 페츠만은 진정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시민보조금(demogrant)으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프리드만의 제안과는 대조적으로 토빈의 시민보조금 계획은 - 복지 국가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을 돕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 사회적 지원과 보험 계획의 전체 체계를 대체하는 것을 꾀하지 않았다. 단지 빈민들의 소득을 끌어올리기 위한 보다 효율적이고 보다 노동친화적인 제도를 만들기 위해 뒤떨어진 요소를 바꾸려 했을 뿐이다.

프리드만의 제안보다 더욱 관대하고 테오발드의 제안보다 더욱 분명한 토빈의 제안에서는 개별 가구가 가족 구성에 따라 변동하는 수준에서 기본 보조금을 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별 가족은 여기에다 기타 수입과 정률로 세금이 부과된 다른 소득을 보충하는 것이었다. (관련 참고자료들과 시민보조금 제안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한 토빈 자신의 설명을 보려면, 2001년 9월에 발행된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 뉴스플래쉬 11호에 있는 수플리시와 토빈의 의견교환을 참고하라.)

닉슨의 가족지원제도와 시민보조금에 대한 맥거번의 지지

이렇게 활기차고 가능성이 보이는 분위기에서 1968년 봄 미국 의회를 향해 “올해에 소득 보장과 지원 체계를 도입할 것”을 호소하는 청원이 조직되었다. 제임스 토빈, 폴 사무엘슨, 존 케네쓰 갈브레이쓰, 로버트 램프만, 해롤드 와츠 그리고 천 명이 넘는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 청원을 지지했다. 물론 밀턴 프리드만은 지지하지 않았지만. 자산 심사에 기초한 현존 복지 체계에 대한 의존이 급격하게 커지고 있었던 맥락 속에서, 이러한 청원은 행정부가 한발 더 나아가야만 하겠다고 느끼도록 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이것은 공화당 대통령 리차드 닉슨 행정부를 대신하여 민주당 상원의원인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한(1927-2003)이 야심적인 사회복지 프로그램인 가족지원제도(FAP)를 마련하도록 이끌었다. 이 가족지원제도는 빈민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원조 프로그램(AFDC)의 폐지를 가져오고, 소득 보장을 부의 소득세 제도에 가까웠던 노동자들에 대한 재정 지원과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1969년 8월 닉슨 대통령은 이 법안을 공개적으로 제출했고, 1970년 4월 미국 하원에서 대다수 의원들은 이를 채택했다. 그러나 1970년 11월 미국 상원의 관련 위원회는 이를 거부했으며, 1972년에는 반대의 완화를 꾀했던 몇몇 수정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너무 소심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그것이 너무 용감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사이의 제휴 탓에 결정적으로 반려되고 말았다. 보다 야심적인 “시민보조금” 제도는 제임스 토빈의 제안으로 민주당 조지 맥거번 후보의 1972년 대통령 선거 강령에 포함되었지만, 1972년 8월에는 빠져버렸다. 1972년 11월 맥거번이 닉슨에게 패배한 것, 그리고 1973년 3월 워터게이트 사건의 시작과 1974년 11월 닉슨의 사임과 연관된 것으로서, 가족지원제도의 상원에서의 패배는 미국의 논쟁에서 짧지만 강렬했던 조건 없는 기본소득 형태 아이디어의 등장에 종말을 고했던 것이다. 하지만 부의 소득세 제도에 관한 다섯 개의 대규모 실험(4개는 미국에서 그리고 하나는 캐나다에서)과 그 결과를 둘러싼 논쟁들에 기초하여 보다 학술적인 차원에서의 토론은 지속되었다.

3. 새로운 출발: 1980년대의 북서유럽

첫 번째 주도권: 덴마크와 네덜란드에서의 논쟁

1970년대 말에 다가서면서 미국에서는 시민보조금 논쟁이 사실상 잊혀졌던 반면, 다수의 유럽 나라들에서는 조건 없는 기본소득에 관한 논쟁이 일필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유럽에서건 미국에서건 이전의 논쟁들은 거의 전적으로 무시된 가운데 일어난 일이다. 예를 들면, 덴마크에서는 세 명의 학자들이 <중심부로부터의 반란>(마이어 외, 1978)이라는 제목으로 나중에 영어로 번역된 전국적으로 가장 잘 팔린 책에서 “시민 임금”이라는 명칭으로 조건 없는 기본소득 제안을 지지했다. 그러나 조건 없는 기본소득에 관해 유럽에서 새로운 논쟁이 일어난 것은 무엇보다도 네덜란드에서다. 이 토론에서 맨 처음 목소리를 낸 것은 암스테르담 자유대학 사회의학과 교수인 J. P. 퀴퍼였다. 다른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쇠약해지고 있었던 반면, 어떤 사람들은 과도한 노동으로 얼마나 많이 몸을 혹사하고 있었던지 이에 충격을 받은 그는 유급 고용의 비인간적 본성에 대처하는 방법의 하나로 고용과 소득의 고리를 끊을 것을 제안했다. 즉, 그가 호소했던 상당한 수준의 “소득 보장”만이 사람들을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퀴퍼, 1976). 1977년에는 네덜란드 기독민주당 좌파로부터 성장한 소규모의 급진적인 정당(급진당, Politieke Partij Radicalen)이 자신의 선거 강령에 조건 없는 기본소득(basisinkomen)을 공식적으로 포함시킨 유럽 최초의 국회의원을 지닌 정당이 되었다. 이 운동은 주요 노동조합 연합체인 네덜란드노총(FNV) 소속의 식품 분야 노동조합인 식품조합(Voedingsbond)이 개입함으로써 매우 급속도로 성장했다. 조합원들 가운데 예외적으로 여성과 시간제 노동자들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던 이 식품조합은 1980년대 전체에 걸친 네덜란드의 논쟁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 조합은 일련의 출판물들과 함께 과감한 노동시간 단축과 결합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행동을 시작했으며, 네럴란드의 조건 없는 기본소득 협회를 자신의 건물에 유치했다. 1985년에는 유명한 ‘정부 정책을 위한 과학위원회’(역주: 네덜란드 정부의 독립적인 씽크탱크)가 이른바 “부분 기본소득”의 도입을 분명하게 제안한 보고서를 출간하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을 때 네덜란드의 논쟁이 첫 번째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부분 기본소득은 진정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긴 하지만 한 개인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는 불충분한 수준이었으므로 현존하는 조건적 최소 소득 제도를 대체하는 것을 꾀하지는 않았다.

영국과 독일에서의 전개

같은 시간대에 이 논쟁은 다른 나라들에서도 비록 보다 분리된 것이긴 했으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1984년에는 ‘자원기구들을 위한 전국위원회’의 후원 아래 빌 조단과 허미온 파커를 중심으로 학자들과 활동가들의 그룹이 모여서 기본소득연구그룹(BIRG)을 만들었다. 이 그룹은 1998년에 시민소득트러스트가 된다. 파이낸셜 타임즈의 사무엘 브리탄 부주필처럼 독립적인 사람들의 지속적인 뒷받침과 이 아이디어에 대해 자유민주당이 공감을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조건 없는 기본소득은 대처의 신자유주의 아래에서보다 블레어의 신노동당 시대에 - 매우 미약한 형태의 아동신탁기금을 제외하고는 - 더더욱 주류 정치에 도달할 수 없었다. 독일에서는 베를린 출신의 생태자유주의자인 토마스 슈미트가 그의 책 <그릇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슈미트 편, 1984)에서 논쟁을 제기했다. 녹색 운동으로부터 나온 몇몇 총서들은 이러한 처음의 주도적 논의들을 이어갔고 발전시켰다(오필카와 보브루바 1986; 오필카와 오스트너 1987). 이와 동시에 프랑크푸르트대 공공재정학 교수인 요하임 미취케(1985)는 부의 소득세 형태로 시행되는 시민소득(Bürgergeld)을 지지하는 장기적인 캠페인을 시작했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의 붕괴(1989)와 그 결과인 독일의 통일(1990년 10월)은 이러한 초기의 공개적 논의를 오랫동안 중단시켰다. 녹색당에 가까운 클라우스 오페(1992, 1996), 더 좁은 범위에서 사회민주당에 가까운 프리츠 샤르프(1993)와 같은 명성 있는 학자들이 이 논의를 떠받쳤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놀라운 집중성이 풍부한 전국적 논쟁을 일으킨 것은 통일이 다소간 소화되고 난 후인 2005년 무렵에나 가서였다.

프랑스에서의 기본소득 논쟁

프랑스에서는 논쟁이 보다 천천히 전개되었다. 영향력 있는 좌익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앙드레 고르(1923-2007)가 처음으로 생명력이 길었던 20,000시간의 보편적 사회 서비스와 결합된 기본소득을 지지했다(고르 1985). 그렇지만, 유급 고용에 의해 완전하게 식민화되어 가는 사회 생활에 대한 두려움은 그로 하여금 조건 없는 소득에 대한 지지로 돌아서게 만들었다(고르 1997). 매우 다른 결에서, 자신을 “좌파 드골주의” 경제학자로 묘사한 요랑 브레슨(1984, 1994, 2000)은 “시간 가치”가 객관적으로 규정한 수준에 맞춰진 것으로 가정된 보편적 “생존 소득”에 대한 복잡한 논의를 제공했다. “공리주의에 대항한 사회과학 운동”(MAUSS)의 지도자인 앨랭 카일레(1987, 1994, 1996)는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집단적 이해관계 행위들에 쏟는 그들의 능력과 의지에 대한 사회의 근본적 신뢰의 표현으로서 조건 없는 소득을 옹호했다. 그리고 하버마스 전통의 정치철학자인 쟝-마르크 페리(1995, 2000)는 유럽연합 차원의 시민적 권리로서 조건 없는 기본소득에 대한 호소를 발전시켰는데, 이는 진부하게 이해되는 완전고용을 영원히 실현할 수 없다는 판단과 사회적으로 유용한 활동들인 “제4의” 분야가 발전될 필요가 있다는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 1986년 신루뱅(벨기에)에서 열린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 창립 회의 모습. 단상 좌에서 우로 리카르도 페트렐라, 그리쩨 루비, 안네 밀러, 닉 도우벤, 필립 판 빠레이스, 클라우스 오페, 빌 죠단.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의 탄생과 확장

이렇게 소소한 국가적 논쟁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이를 키웠던 지적 기여들은 이 아이디어의 역사 대부분을 인식하진 못했던 것이고, 만일 인식했다 하더라도 그 전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의 창설 덕택에 점차 서로 접촉하게 되었다. 1984년 3월 루뱅대학(벨기에) 가까이에 있는 한 연구자 그룹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조건 없는 기본소득에 대한 시나리오를 “챨스 푸리에 그룹”이라는 집단 필명으로 출판했다. 이 시나리오는 이 그룹이 상을 받게 되는 노동의 미래를 논하는 시합에 진출했는데, 1986년 9월 신루뱅(벨기에)에서 몇몇 나라들의 조건 없는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모인 바로 그 첫 번째 회의는 이 시합과 함께 개최되었다. 거의 홀로 이 아이디어를 지지하는 줄로 알았던 참가자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발견하고서 유쾌하게 놀랐으며, 이에 힘입어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를 출범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네트워크는 정기적인 뉴스레터를 발간했고 2년마다 회의를 개최했다. 미국, 남미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유사한 네트워크들의 탄생, 호주와 뉴질랜드에 이미 존재하는 네트워크들과의 접촉 강화, 그리고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 회의들에서 비유럽인들의 수가 증가한 현상 등은 2004년 9월 바로셀로나에서 개최된 10차 총회에서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가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로 확장되는 배경이 되었다. 새롭게 창설된 이러한 전세계적 네트워크의 유럽 바깥에서의 첫 번째 총회는 2006년 10월 케이프타운대학(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개최되었다.

4. 소소하지만 실재하는 알래스카의 배당

이러한 논쟁들에서 많은 참가자들이 생겨난 것은 진정으로 보편적인 기본소득 제도의 도입과 발전이 오늘날 존재하게끔 했다. 1970년대 중반 알래스카(미국)의 공화당 소속 주지사 제이 하몬드는 북미에서 가장 커다란 석유지대인 프루도 만의 석유 채굴로 얻어진 커다란 부가 오직 주의 현재 주민들에게 혜택을 주도록 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는 석유로부터 얻어진 수입 일부의 투자를 통해 이러한 부가 축적되는 것을 보장해주는 기금의 설립을 제안했다. 그리고 1976년 주 헌법의 개정으로 알래스카영구기금(APF)이 설치되었다. 알래스카 주민들이 이 기금의 성장과 지속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주지사 하몬드는 모든 거주자들에게 그들의 거주 햇수에 비례하는 배당을 매년 지급하는 것을 구상했다. 그런데 다른 주들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차별한다는 이유로 미국 대법원에 제소된 이 제안은 수정 연방 헌법 제14조인 “동등 보호 조항”에 위배되는 것으로 판결이 났다. 이러한 거부를 극복하기 위해 이 제안은 수정되었고, 진정한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변형되었다. 1982년 이 프로그램의 시행 이후 알래스카에 적어도 6개월 이상 공식적으로 거주한 모든 사람은 - 현재 650,000명 정도 - 나이나 주에서 거주한 햇수가 얼마나 되는지 간에 매년 일정한 배당을 받아왔다. 이러한 배당은 석유 채굴 수입을 이용하여 설치된 영구 기금을 바탕으로 이전 5년에 걸쳐 벌어들인 평균 이익의 일부에 해당한다. 이 기금은 처음에는 오로지 주 경제에만 투자되었지만, 나중에는 국제적으로 분산투자를 하게 됨에 따라 변동을 증폭시키는 대신 지역 경제 상황의 변동을 완화시켜주는 배당의 분배를 가능하게 했다(골드스미스, 2004). 이 배당은 초기에는 매년 1인당 300달러 수준에 머물렀지만, 주식시장이 폭락해 몇 년 동안 배당이 절반으로 깎였을 때인 2000년에는 2,000달러 가까이에 달했다. 하지만 2008년에는 1인당 2069달러를 지급함으로써 연간 배당의 크기가 새로운 최고 기록에 도달했다. 알래스카의 석유 배당 제도는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게도 계속해서 제안되었지만, 여전히 유일무이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는 알래스카가 미국의 주들 가운데 가장 평등주의적인 주가 되도록 돕고 있다.

“기본소득의 역사”는 야닉 판더보르트와 필립 판 빠레이스가 쓴 <보편적 수당L’allocation universelle>의 1장에 기초하고 있다(확장된 영어판이 준비 중인데, 하버드대학 출판부가 발행할 예정이다). 웹에 있는 이 글은 사이먼 버른바움과 칼 위더퀴스트가 편집하고 요약한 것이다. 참고자료들의 전체 목록은 <보편적 수당>(판더보르트, 야닉과 판 빠레이스 필립, 2005, 파리: 디스커버리)을 보라. 기본소득에 관한 가장 최근의 소식과 출판물들은 여기(http://www.basicincome.org/bien/news.html)를 보라. 전체적인 관련 서적 목록은 여기(http://www.usbig.net/bibliography.html)를 보라.

[주]

1. 버트란트 러셀, <자유로 향하는 길.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그리고 생디칼리즘>, 런던: 언윈 북스(1918), 80-81쪽과 127쪽.

2. 밀너, 버트램 피카드, 메이저 더글라스, 제임스 미드, G. D. H. 콜에 대해서, 그리고 보편적 기본소득 제안이 처음 공개되면서 나타난 다른 양상들에 대해서는 판 트리어(1995)의 책을 보라.

3. 기본소득이라는 용어는 다음의 문맥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밀은 이상주의를 희생하고 적당한 정도의 경제적 불평등을 수용한 사회주의의 형태들이 보다 가까운 실행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런 이유로 그는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먼저 할당하고 생산물 몫의 나머지를 자본, 재능 혹은 책무, 그리고 실제로 수행된 노동에 분배한 푸리에주의자들 혹은 어느 정도 푸리에주의의 형태인 것을 높이 샀다.”(310쪽.) 이에 상응하는 네덜란드어 표현(basisinkomen)은 이미 1934년에 노벨상 수상자인 잔 틴버겐이 그의 모국인 네덜란드의 노동당(PvdA) 강령에 관한 토론을 하면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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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제 민주주의 (유시민, 돌베게) 읽기

 

 

후불제 민주주의(유시민/돌베게)를 읽고….

 

 

후불제 민주주의. 기막힌 이름이다. 예리한 통찰에서 비롯한 재미있는 시선이다. 1945년 독립이후 구성된 제헌의회는 1947년 헌법을 완성하고, 형식상의 민주주의 국가를 완성한다. 말 그대로 이름뿐인 민주 공화국의 역사에는 독재의 암운이 드리웠고 1987년에서야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한다. 헌법이 존재(sein)아닌 당위(sollen)로서 살아있었다. 당위를 존재하게하기 위해 수 많은 젊은이가, 지식인들이, 국민들이 피를 흘렸다. 그렇다면 2010년 현재 헌법은 존재로서 살아 숨 쉬는가? 저자는 우리가 여전히 후불을 치르는 중이라고 주장한다. ‘문명의 역주행’을 하고있는 현 정부도 우리가 치르는 대가에 포함돼 있다.

 

저자는 민주주의의 완성을 헌법에서 찾는다. 때문에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의 근거 또한 헌법에서 찾고 있다. 예를 들어 ‘미네르바’ 사건의 경우, 헌법에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오류를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어겼을 뿐만 아니라, ‘헌법 제 27조 ④형사피고인은 유죄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를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 외에도 ‘법치주의는 대통령이 헌법을 준수하는 것이다(117p)’ 같은 주장은 근거를 헌법 제 69조 ‘대통령은 취임에 즈음하여 다음의 선서를 한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 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 에서 찾고 있다. 이외에도 행복, 자유, 주권, 유신헌법, 재산권, 통일 등등 수많은 키워드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헌법에서 근거를 내세운다. 헌법이 우리 사회 구성의 최고 가치이자 합의물이기에 그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다.

 

다른 흥미로운 점은 헌법을 해석하는 그의 시각이다. 그는 스스로를 ‘사회자유주의자’라고 칭하며, 사회자유주의자로서 바라보는/바라는 사회, 국가에 대한 관점을 늘어놓는다. 일변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참여 정부의 과업을 보면 ‘사회’라는 수식어에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측면이 있다. 지난 정부가 이라크 파병, 한-미 FTA 등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85p)’같이 ‘자유’에 방점을 둔 그의 생각을 접할 때마다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진보진영에서도 이러한 이유로 참여정부를 줄곧 공격했었다. 심지어 노회찬 전 의원은 민주노동당 시절,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사이에 실개천이 있다면,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에는 한강이 있다.”고 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 점이 몹시 서운했던 모양이다. 이 내용을 언급하는 제2부에서 참여 정부에서 일하던 당시를 회고하며, 변명 아닌 변명과 당시의 소회를 늘어놓는다.

 

그는 ‘선과 선의 연대를 위하여’라는 에필로그로 마침표를 찍는다. 책 전반에서 언급한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 헌법을 당위 아닌 존재로 만들기 위해 ‘선의 연대’를 강조한다. 이 책을 집필하던 당시는 노 전 대통령 서거 이전이다. 서거 정국 이후 ‘문명의 역주행’은 강화되고 있고, 다수의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동조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선의 연대’를 강조하던 저자를 중심으로 지난 17일 국민참여당이 창당했다. 일단, 정치에서 선과 악을 규정하는 방식에는 반대하지만, 국민참여당이 그가 말하는 연대의 구심력이 될지, 원심력이 될지 지켜보는 일은 흥미롭다. 올 6월에 있을 지방선거가 더욱 기다려지는 이유다.

 

 

 

♣ 인용구

69p 진보는 ‘당위’를 추구하고, 보수는 ‘존재’를 추종한다. 진보는 아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위해 싸운다.

 

85p 경쟁은 그저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97p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 현상

…그들은 좋은 복지 제도가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하고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데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동전의 뒷면을 애써 외면한다. 경제적 번영 또는 국가 경쟁력과 복지, 이 둘 사이에 서로를 누적적으로 강화하는 ‘양의 되먹임’ 현상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 출력의 일부를 다시 입력 쪽으로 되돌려 보내서 개선하려고 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입력신호에 출력신호가 첨가되는 것을 양되먹임, 약화되는 것을 음되먹임이라 한다.

 

 

 

♣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문제

 

1. 2010년 현재 ‘헌법’은 존재인가 당위인가?

 

2. 최근 법 해석을 둘러싼 법원과 검찰의 충돌이 잦다.(강기갑 의원 무죄, 집시법 위헌 판결 등) 원인이 무엇인가?


'강의' 신영복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돌베개)   -신영복-

드디어 다 읽었다. 두꺼운 책이라 언제 다 읽지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긴 것 같다. 이 때문에 중간 부분, 특히 노자와 장자편은 마음이 아닌 눈으로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줄줄이 이어지는 한문들은 이 책을 완독하는데 마주친 또 다른 어려움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재미있는 책이었다. 동양고전 - 시경, 서경, 초사에서 시작하여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한비자, 불교, 신유학, 대학, 중용, 양명학 까지-을 소개하고 함께 원문을 읽고 신영복 선생님의 해설을 들었다. 정말 말그대로 '강의' 같은 책 이었다. 평소 관심있었던 사상의 배경에 대해 알고, 몇몇 구절이나마 접할 수 있어 기뻤다. 책장 넘기기를 잠시 멈추고 노트에 필기를 해야할 때가 많았다. 그만큼 마음에 담아두고 싶었던 구절이 많았다.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다. 특히, '주역'의 효,괘...등의 개념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음에 전반적으로 다시 읽어봐야겠다. 한자 공부도 더 해야겠도 원문도 더 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좋았던 점은 고전을 매개로한 신영복 선생님의 해석과 현세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고전을 전반적으로 '관계'로 바라보고, 실천을 강조하시는 점이 참 좋았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적어둔 구절들을 마음에 새기고, 요즘과 같은 亂世에 관계와 실천의 끈을 놓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여러 좋았던 구절이 있으나, 너무 많아 노트에 적어둔 구절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두 구절만을 블로그에 남겨두련다.

80p  굴원 '어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179p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 爲政
학하되 사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경험과 실천)하되 학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작문. 청춘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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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은 계절의 시작이다. 처음해야 하는 일이 많은 때다. 특히나 농부들은 일년 농사를 위해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여러 종류의 씨앗을 심을수록 돌아오는 가을에 다양한 작물을 수확할 수 있다. 산에도 들에도 온갖 종류의 새싹이 트고, 자라서 형형색색의 꽃과 나무가 된다. 인생의 봄, 청춘에도 숱한 처음이 있다. 태어나 처음 사랑을 하고, 그 쓰라림을 술로 달랠 수도 있다. 공부 아닌 학문의 세계에 빠질 수도, 나홀로 여행을 떠날 수도 있는 때다. 그렇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특권, 바로 청춘이다.

 

 요즘 젊은이들도 많은 일을 한다. 그 어느 세대보다 바쁜 청춘을 보내는 듯하다. 하지만 그 면면을 살펴보면 그들은 서로 비슷한 모습의 삶을 살고 있다. 청춘이 획일화되고 있다. 그야말로 획일적인 종.고교 시절을 벗어난 이후부터 진정한 청춘이라고 봐도 그들의 삶은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OECD 국가 중 최고 높은 대학진학율을 자랑이라도 하듯, 대부분이 졸업 후 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진정 학문을 하고자 하는 이는 별로 없다. 대부분이 잠시 한 눈을 팔다가도 취업을 목표로 대학 생활을 한다. 전공 서적은 시험 기간에 잠깐 펴서 '학점 방어용'으로 쓰고, 평소에는 토익, 토플 등 영어 공부에 여념이 없다. 방학 때도 공모전, 인턴 생활로 바쁘다. 힘에 부칠법도 하건만 스스로 '나는 열심히 살고 있다'는 마취제를 놓으며 버틴다. 여행, 취미활동 따위로 시간을 보내는 친구들은 아직 '정신 못차린 놈'에 다름 아니다.

 

  그들 탓이 아니다. 스스로 위축시킨게 잘못이라면 잘못일까. 궁극적 원인 제공은 사회가 했다. 그렇게 열심히 4년을 보내도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다. 성실한 청순에 대한 대가는 패배감 뿐이다. 게다가 높은 등록금은 청춘을 고개 숙이게 한다. 부모님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부모님께 진 빚을 갚으려면, 하루라도 빨리 취업을 해야한다. 이러한 구조가 변하지 않는 이상,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말하고 싶다. 한 번 뿐인 청춘을 다르게 살아보자고 말이다. 국제 구호 활동가 한비야씨가 모든 것을 버리고 세계 여행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자리에 있지 못할 것이다. 안철수 씨가 불안한 미레에 청춘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그저 평범한 의대생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들처럼 다른 길을 걸어온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가 한 층 재미있고, 발전해 나갈 수 있다. 더욱이 가진 것 없는 청춘이라 버릴 것도 없다. 다만, 조금 다른 씨앗을 뿌려보자는 것이다. 크기와 모양이 다른 오색 빛깔의 열매가 우리 손에 쥐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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